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콘스탄티노스 3세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콘스탄티노스는 613년 1월 22일 아버지 이라클리오스에 의해 공동황제로 즉위했다.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의 사촌 니케타스(Nicetas)의 딸, 즉 6촌 누이 [[그레고리아]]와 약혼했다. 사실 이 부부는 족보상으로 [[근친상간]]에 속했지만 부황도 근친으로 결혼을 했기 때문에 대충 넘어갔다. 거기에 아버지 이라클리오스가 조카 [[마르티나(동로마 제국)|마르티나]]와 결혼하면서 온갖 비난을 탱킹한 점도 있다. 콘스탄티노스와 그레고리아는 629년, 또는 630년에 결혼을 했으며 그해에 첫 아들 콘스탄스, (이후 콘스탄스 2세)를 낳는다. 둘째역시 아들이었으며 그의 이름은 테오도시우스였다. 콘스탄티노스 부부는 이후 딸도 한명 낳는데, 이 딸, 마얀(Manyanh)은 이후 사산왕조의 마지막 황제가된 야즈네게르드 3세와 결혼한다. 641년 아버지가 죽자 콘스탄티노스는 황제로 즉위한다. 콘스탄티노스는 단독황제로 즉위하지는 못하고[* 공동통치가 아버지의 유지였다.] 아버지 이라클리오스의 두번째 부인이자 본인의 사촌인 마르티나의 아들 이라클로나스와 공동통치를 하게 되었다. 하지만 세 달 만에 [[결핵]][* [[영어 위키백과]]에 의하면 독살 의혹이 강하게 제기된다. 실제로도 세 달 전에 먼저 죽은 아버지 입장에서, 저렇게 금방 따라 죽을 것 같았으면 아예 황제 자리를 맡기지 않았을 법 하다.]으로 [[요절/목록#s-2.3|29세]]로 [[요절]]하였다. 제위[* 공동 황제를 맡고 있었다고 했지만, 좁은 의미의 제위는 당연히 선임 황제, 즉 정제(正帝 : Augustus)위를 의미한다.]는 후임 황제인 [[이라클로나스]]가 이어받았지만, 원래 근친혼으로 시민들과 종교계로부터 인기가 없는 모자라 그런지 몇 달 못 버티고 이 콘스탄티노스의 아들인 [[콘스탄스 2세]]에게 공동황제를 허용한 후 결국 뺏겼다. 여기에다가 그는 코가 잘렸고 어머니 마르티나는 혀가 잘린 후 [[로도스 섬]]으로 유배를 당했는데, 이런 일련의 절차에는 언뜻 유명무실해 보이던 콘스탄티노플 [[원로원]] 의원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. 여하튼 여기에는 콘스탄티노스의 복안이 크게 작용했는데, 그 몇 달 안 되는 사이에 자기 쪽 측근인 발렌티누스를 동부군 사령관으로 심었고 그가 그 해 9월 아들 콘스탄티노스의 복위를 이끌었다. 하지만 발렌티누스는 딸을 새 황제에게 시집보내고 실권자가 된 후 야심을 품어 2년 뒤 공동황제위[* <비잔틴 제국의 역사>에 의하면] 혹은 제위 자체(즉 찬탈)[* 영어 위키백과에 의할 경우 : [[https://en.wikipedia.org/wiki/Valentinus_(usurper)|Valentinus_'''(usurper)(찬탈자)''']]]를 공개적으로 요구하다가 성난 수도 시민들에게 살해당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